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말을 더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가 두 사람 있는데, 둘 다 내가 한때 짝사랑했었던 분들이다. 왜 짝사랑으로 끝났느냐, 그것은 오로지 그쪽에서 나한테는 추호의 이성적 관심을 보이지 않은 탓이다.

한 분은 내가 고등학교때부터 가던 병원의 의사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나의 학부와 대학원 시절에 나를 지도하셨던 지도교수님이시다. 의사 선생님은 아주 자상하고, 양심적이고, 대단히 젠틀한 분이셨다. 고등학교때, 내가 사는 동네에 처음 개업한 것을 인연으로 그동안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를 비롯하여, 나의 나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지금은 나의 아이와 시부모님까지 돌봐주고 계시니 이 분과의 인연도 사소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선생님을 향한 나의 짝사랑은 대학시절이고, 그땐 다른 이성문제도 한창 복잡할 때라 사실은 내가 전력투구하지 않고 좀 점잖게(?) 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정은 좀 달라졌으리라 나는 믿는다.

한번은 개한테 다리를 물려 병원에 간 적이 있어(그 개도 내 다리가 탐이 났다보다! 사람보다 안목이 뛰어난 개!)) 선생님 앞에서 청바지를 벗어야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때 난 무슨 생각을 했느냐! 니나가 열병에 들떠 슈타인 박사를 찾아갔을 때 슈타인이 아픈 니나에게 처음 열정을 느끼는 대목을 떠올렸다. 이 선생이 나의 다리를 보고 완전히 정신을 잃으면 어떡하나, 난 남의 가정을 깨고 싶지는 않은데........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운명이 이끄는 대로 가자고 작정하고 바지를 벗었다! 그리고......물론 아무 일도 없었다. 선생님은 그저 상처만 보고, 됐다고 바지 입으라고 한말씀만 하셨다. 그때!! 선생님께서 말을 살짝 더듬으셨는데...... "돼, 됐어요, 바, 바, 바지 입으세요." 그때 선생님의 말더듬은 그와 나의 뛰어넘을 수 없는 많은 장벽과 그 와중에도 숨길 수 없는 애정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그 짧은 말더듬의 순간은 내가 그 선생님을 좋아했던 시간 중에서 가장 마음 떨리는 순간이었다. 물론 완전히 나 혼자 생각이긴 하지만.

나의 지도 교수님은 그 의사선생님보다는 나와 훨씬 밀접한 분이시다. 음악과 문학, 영화, 모든 면에서 해박했던 그분은 오랫동안 나의 우상이었고, 그분이 아니었다면 나처럼 공부에 관심없는 사람이 대학원에 갈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도교수를 좋아해서 대학원에 가고, 그 대학원에서 엉뚱한 학생과 연애에 빠져 결혼을 한 후로 지도교수님을 한번도 찾지않은 지조와 의리의 인물이 바로 나다!

아무튼 나의 지도교수님도 말을 약간 더듬으셨고, 대인관계에서 수줍음이 많은 분이셨다. 그리고 그것을 굉장히 의식하시는 분이셨다. 교수님도 나와 같은 동네에 사셨기 때문에 내가 다니던 병원에 다니셨다. 어느날 지도교수님께서 내가 짝사랑한 의사선생님 얘길 하시길래, 나는 그 의사선생님도 말을 약간 더듬는다는 얘길 했다. 그랬더니 지도교수님은 "그 의사는 말을 더듬는 것도 아주 매력적이더라"라고 하시길래 난 "선생님도 그 정도인데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나의 지도 교수님은 너무나 당황하시는 것이다. 교수님은 의사선생님의 말더듬은 매력으로 보면서 자신의 말더듬에 대해선 치명적 결함으로 느끼고 계셨나보다.

두분 선생님의 영향으로 나에게 말더듬이란 지적인 남자의 매력을 풍요롭게 장식해주는 어떤 것이다. 특히 교수님께서 어떤 문제에 대해 열을 내어 설명하시면서 약간씩 말을 더듬을 때 -교수님은 중요한 문제에 이르면 꼭 말을 더듬으셨다- 그것은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까 더욱 기대를 부채질하고, 교수님의 지적인 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난 그 말더듬는 순간의 긴장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나도 말을 좀 더듬어보려고 일부러 말을 더듬으려고 연습까지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걸 갖추기란 어려운 법이어서 난 그 말더듬의 매력까지는 가질 수가 없었다.

지금보다 어릴 적에 나의 고민중 하나는 얼굴이 너무 쉽게 붉어진다는 것이었다. 내가 머리속에 그리던 이상적인 여자는 어떤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아주 당당하고 쿨한 그런 여자였는데, 나는 조금 떨린다거나 다음 순간의 신체적인 접촉에 대한 기대가 무르익는 그런 연애의 순간에 얼굴이 샛빨게진다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있었다. 그런데, 훗날 알았지만(사실은 그때도 알고있었겠지) 나의 얼굴 붉어짐이 남자들에게는 아주 큰 매력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는 그런 얼굴 붉어짐으로 남자를 꼬실 생각은 없었다. 그땐 정말 그게 큰 고민이었다. 지금은 세상사에 시달리다보니 붉어지려고 해도 잘안된다. 나에겐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던 얼굴 붉어짐이 이제는 그립기조차 하다.

나를 알던 남자들이 내가 얼굴 붉어짐으로 그렇게 고민한다는 것을 몰랐듯이 나에겐 그렇게 매력적인 말더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고민한다는 것을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그것은 마음의 문제라는 말이 맞다. 그래서 나는 이런 충고를 하고 싶다. 마음은 고치되 말더듬을 완전히 고치지는 말라고. 여자에게 고백할 때 살짝 말을 더듬는 남자, 그것처럼 매력적인 것도 없다. 고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말더듬의 기술을 동원한다면 이성문제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고 나는 장담한다. 이런 게 삶의 지혜가 아니겠는가.